카게야마가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의 부모가 순전히 정서 함양을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집 근처 바이올린 교습소에 보냈던 것이 그 시작이었는데, 아이는 예상 밖으로 이 조그만 나무 악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일 년쯤 후에는, 아주 어릴 때부터 16분의 1 또는 8분의 1 바이올린을 들고 고사리 손에 굳은 살을 박아가며 인생의 절반 정도를 바이올린과 함께 한 아이들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토비오, 바이올린에 인생을 걸 수 있겠니?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갈 즈음에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주변에서는 이 천재를 가만 둘 수 없다고 아우성이었지만 부모는 이 문제를 온전히 아이의 선택에 맡기고 싶었다.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 매일매일 바이올린을 켠다면 어떨 것 같니?’ 또는 ‘장래에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따위의 나름 눈높이에 맞춘 질문을 던질까 싶었지만 관두었다. 어린아이들에겐 의외로 결정적인 순간에 본질을 꿰뚫는 힘이 있다는 것이, 그의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응!
설렘으로 가득 찬 눈이 빛났다. 아들의 재능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을 놓고 저울질하던 부모는 이 날의 짧은 대화를 계기로 마음을 굳혔다.
3.
본격적으로 음악에 파묻힌 카게야마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일찍 시작하기만 했다면 파리라든지,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 같은 곳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그는 국내의 음악학교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국내 콩쿨이나 어린 영재들을 선보이는 무대에 오른 뒤로는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카게야마 토비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간 클래식 계에 이렇다 할 유망주가 없다며 안타까워하던 차에 떠오른 그의 존재는 사람들을 흥분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대로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카게야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부딪혔다. 시작은 교내 오케스트라에서의 트러블이었다. 퍼스트 바이올린에 섞여있을 때는 몰랐지만 협주곡의 솔리스트로 세우자 문제가 드러났다. 아무리 신동이니 천재니 해도 아직은 덜 다듬어져 있는 아이들이었다. 카게야마가 원하는 만큼의 음악을 만들기에는 아직 실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카게야마에게는, 그것을 수긍하고 조율할 만한 만한 이해심이나 인내심이 부족했다. 혼자 튀어나가지 말고 주변의 소리를 들어보라는 지휘 담당 교사의 지적도 별 소용이 없었다.
연주 실력 자체만 놓고 보자면, 두말할 것 없이 출중했다. 특히 반주 없이 내달리는 카덴차*에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기교가 여실히 드러났다. 이는 동경뿐만 아니라 시샘 또한 불러일으켰으며,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독주에 따라가지 못하고 지친 단원들이 그것을 반발심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학생들끼리 모인 연습에서 신경질적으로 ‘좀 더 빠르게!‘를 외치던 카게야마에게 악장은 활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혼자 잘났지. 더는 못 맞춰주겠다.’ 그리고 일제히 쏟아진 몇십 개의 싸늘한 눈동자.
솔리스트는 교체되었다. 그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지, 급기야는 일반적인 연주에서 피아노 반주자와의 호흡까지 엉망이 되어 버렸다. 고교에 특별 장학생으로 진학하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입시에서조차 미끄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주변에서는 수군댔다. 협주가 안 되니 이대로라면 콩쿨이고 뭐고도 다 끝이라며 고소해하는 축도 있었다. 너무 빨리 자란 아이가 겪는 성장통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이라며 혀를 차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카덴차: 솔리스트의 기교를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구성된 화려하고 자유스런 무반주 부분
4.
꼭 관현악이나 실내악이 아니라도 굳이 무반주인 곡을 택하지 않는 이상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오롯이 혼자서 연주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카게야마의 재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이대로 간다면 안타깝게도 빛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어른들은 초조해하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았다. 그러나 무작정 일본 밖으로 내보내 비슷한 레벨의 아이들 틈바구니에 밀어넣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어떻게?
마땅한 해결책은 없는 채로 도내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일단은 모두가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방법은 앞으로 차차 생각해 나가야 했다.
5.
“현악 챔버요?”
3학년, 피아노 전공의 스가와라 코우시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선배의 첫인상은 일단 ‘머리카락 색깔이 특이한 사람’이었다. 색이 굉장히 옅어서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땐 거의 회색에 가까웠는데,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과 대단히 잘 어울렸다. 현악 챔버 동호회에 들어오지 않을래? 그가 입학 첫날부터 일면식도 없는 카게야마를 다짜고짜 찾아온 용건이었다.
솔직히 협주는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굉장히… 서툴러서. 만약 그냥 바이올린 실력이 좋다는 소문만 듣고 온 거라면 곤란했다. 카게야마는 쭈뼛쭈뼛 운을 떼었다.
“저어… 협주는… 자신이 없어서요.” “알고 있어.”
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스가와라가 씨익 웃었다.
“음,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 사람이 많지 않거든. 우리끼리 가끔씩 모여서 4중주, 5중주 하다가 좀 더 이것저것 해볼까 싶어서.” “…….”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팬이거든.”
의외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망설임을 가득 담고 데록데록 굴러가던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저번에 바흐 들었어, 이케부쿠로에서.” “아.”
작년 봄 예술극장에서 있었던 영재 콘서트 얘기였다. 비록 큰 무대는 아니었지만, 아직 국내 콩쿨 우승 외에는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카게야마가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눈초리를 피할 순 없었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지, 그의 레퍼토리는 바흐 파르티타 중 샤콘느였다. 청중에게 익숙한 곡을 연주하는 것은 양 날의 검과도 같았다. 쉽게 집중을 끌 수는 있지만, 약간만 삐끗해도 예민하게 알아차려지고 만다.
다행히도 의혹의 시선을 깨끗하게 거두어낼 정도의 호연이었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고작 오 년 남짓밖에 안 된 열네 살 짜리의 연주였다는 것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랬다. 카게야마 본인으로서도 100%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던 연주로 기억했다. 지금은 거기에 변명처럼 한 마디가 더 붙었다. 그야, 반주가 없었으니까….
“꼭 같이 해 보고 싶어.”
스가와라가 쐐기를 박았다. 부드러운 말투, 강압적이지 않은 권유. 그러나 묘한 힘이 있었다.